나쁜 환경이 주어졌을 때
그 환경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사람을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.
첫 번째는
나쁜 환경에 쉽게 물드는 사람이다.
두 번째는
나쁜 환경을 일부러 멀리해
물들지 않는 사람이고,
세 번째는
나쁜 환경 안에 있으면서도
물들지 않는 사람이다.
네 번째는
나쁜 환경에 물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쁜 환경을 좋은 환경으로 물들이는 사람이다.
물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?
술 마시는 친구와 같이 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술 마시게 되고,
화 잘 내고 욕 잘하는 사람과 같이 살다 보니 자기도 덩달아 화 잘 내고 욕 잘하게 되고,
욕심 많은 사람과 같이 살다가 자기도 모르게 탐욕스럽게 되는 사람이다.
마치 안개비에 옷 젖듯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들어 버리는 사람이다.
그냥 남 하는 대로 따라 한 것이다.
경계를 멀리해서
물들지 않는 사람은
나쁜 것을 멀리함으로써
물들지 않는 사람이다.
이런 사람은 술 먹는 친구를 멀리하고, 욕하는 사람과는 같이 다니지 않는다.
'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'는 거다.
그런데 이 첫 번째와
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
물들 위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.
경계 속에 있으면서도
물들지 않는 사람은
상황을 피해서
물들지 않는 게 아니라
상황 안에 있으면서도
그 상황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.
술 마시는 친구들과 같이
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.
욕심내는 사람들과 세상살이를 같이 하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다.
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어떤 상황에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, 대승보살이다.
첫 번째 사람은
어떤 일을 할 때
실수하지 말아야지 하는데
번번이 실수하는 수준이고,
두 번째 사람은
실수하지 않기 위해
아무 일도 안 하는 수준이며,
세 번째 사람은
뭘 해도 실수를 안 하는 수준이다.
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
실수를 해도 상관없고
안 해도 상관없다.
왜냐하면 실수를 하면
그 실수를 통해 더 큰 배움을 얻고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.
즉, 전화위복이라는 것이다.
이 네 번째 단계를 알아야 부처의 경지인 해탈의 의미를 알 수 있다.
비유를 들어 설명하면,
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
술꾼을 친구로 삼지 않고,
세 번째 사람은
술꾼과 친구는 하되
자기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,
네 번째 사람은
술꾼과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신다.
그러니 술꾼과 구분이 안 된다.
하지만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면 어느새 술꾼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게 된다.
욕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서도
나는 욕하지 않는다는 수준이 아니라, 욕 하는 사람과 같이 욕하면서 살더니 같이 살던 사람이 욕을 안 하게 된다는 거다.
욕심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는데 같이 살던 사람들이 욕심을 내지 않게 되고,
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과
어울려 돌아다녔는데
나중에 보니 어울리던 사람들이 다 착하게 바뀌어버린다.
이렇게 네 번째 부류는
물들이는 사람이다.
자기를 더럽혀서
더러운 때를 닦아내는 걸레처럼 스스로 걸레가 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다.
- 〈깨달음〉 법륜 스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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